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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모있는 정보

거칠게 읽는 전쟁 세계사

by 실화소니 201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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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최초의 대격돌! : 페르시아 전쟁 (BC 492년 ~ BC 448년) ⑧


『제 3차 페르시아 전쟁 :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1편

[영화 '300 : 제국의 부활' 중에서]



1. 아테나이 함락


BC 480년 8월,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육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헬라스의 연합군은 레오니다스의 과감한 결단 덕분에 퇴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상당 수의 헬라스 병사들은 무사히 아티카 반도까지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아르테미시온 앞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맞아 고군분투하던 헬라스의 연합함대도 테르모필라이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는 전투를 중단하고 아티카 반도 남쪽으로 철수합니다. 이때 아테나이의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군에 종군하고 있는 이오니아의 헬라스 인들로 하여금 반란을 유도하는 선동적인 내용을 비문(碑文)에 남깁니다.

이즈음에 페르시아 군은 아르테미시온에서 헬라스의 연합함대가 후퇴하는 것을 보고는 전세(戰勢)가 이미 자기들에게 기울었다고 판단하고는, 함대를 둘로 분리하여 양동작전으로 헬라스의 연합함대를 단시간에 전멸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 중 하나의 함대를 에우리포스 해협으로 남하하도록 하고, 다른 함대는 에우보이아 섬 바깥 쪽 연안을 우회하도록 해서 두 함대가 아테나이 앞바다인 사로니코스 만(Gulf of Saronikos, 혹은 아이기나 만)에서 조우하라고 명령합니다.


한편, 테르모필라이 협로에서 핼라스 연합군을 격퇴시키고 헬라스 본토의 남부로 진격하던 페르시아의 육군은 보이오티아의 도시들과 아티카 반도의 도시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고 약탈하면서 아테나이까지 육박합니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나이를 포위하여 총공격을 감행했고, 이에 맞서 아테나이에서는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결사적으로 방어합니다. 그러나 중과부적! 결국 아테나이는 맹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군에게 함락되고 맙니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나이를 철저히 짓밟습니다. 가옥은 모두 불태워졌고, 도시에 남은 성인 남성들은 거의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아이들과 여인들은 노예로 팔기 위해 연금되었습니다. 아테나이의 함락 소식을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크게 기뻐하며 페르시아 육군에게 잠시동안의 휴식시간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헬라스 세계에서 하나 남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의 진격을 위해 사위인 마르도니오스와 아르테미시아, 아카이메네스, 아리아비그네스, 다마시튀모스 등의 제장들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2. 육상전이냐, 해상전이냐?


크세르크세스은 두 가지 전략을 두고 고민에 빠집니다. 두 가지 전략 중 하나는 사로니코스 만에서 헬라스 연합함대를 섬멸한 다음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할 것이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곧바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육해상 공격을 집중하여 헬라스 본토의 정복을 완료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마르도니오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장들은 "헬라스의 연합함대는 우리보다 숫적으로 열세(劣勢)입니다. 아테나이가 함락한 지금, 적의 함대까지 전멸시키면 라케다이몬을 비롯한 펠로폰네소스의 나머지 나라들은 알아서 항복할 것이 뻔합니다."라며 살라미스에서 해상전으로 승부를 보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카리아의 아르테미시아는 다음과 같이 반대 주장을 폅니다.

"우리는 이미 스키아토스와 아르테미시온에서 수 백 척의 전함을 폭풍으로 잃었습니다. 수많은 훌륭한 병사들도 예기치않게 요동치는 에게 해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 에게 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헬라스 인들입니다. 게다가 사로니코스 만은 조류가 거칠고 불규칙적이며 그 지형은 매우 복잡합니다. 자칫 조류에 휘말려 더 좁은 안쪽으로 몰리게 되면 우리 전함끼리 부딪혀 좌초되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상전보다는 일부 함대만 이 곳에 남겨두고 나머지 함대는 펠로폰네소스로 진격하여 수륙양공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점령해버리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주장이 더 현실적이었지만, 이미 자만심에 도취된 크세르크세스는 다른 제장들의 주장을 쫓아 사로니코스 만에서 해상전으로 승부를 보기로 결정합니다. 이리하여 두 경로로 남하해온 페르시아 함대는 사로니코스 만의 동북쪽 먼바다에서 집결하여 전열을 재정비합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이 결정이 길었던 대전(大戰)에 종지부를 찍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한편, 아테나이의 함락 소식을 접한 헬라스 연합군에서도 앞으로의 방어 전략을 두고 이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습니다. 현 상황에서 헬라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라이와 아르테미시온 두 곳이 모두 뚫렸기 때문에, 육상이나 해상 모두 다시 방어를 해야한다는 큰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헬라스 연합군에게는 현재 육로로는 아티카 반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코린토스 지협을, 해로로는 사로니코스 만을 철저하게 방어해야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다시 뚫리게 되면, 헬라스는 그대로 패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때 헬라스의 연합함대 지휘관 중 한 명인 코린토스 인 아데이만토스는 함대를 모두 코린토스 지협의 해안가로 철수시켜 그 곳에서 지협의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폈습니다.

"안됩니다. 우리는 육상이 아닌 해상에서 승부를 봐야합니다. 우리가 코린토스 지협에서의 방어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아티카 반도를 포기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북쪽 본토의 지배권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들이 코린토스 만으로 진입하여 육로 공격에 집중할 것인지 조차 현재로써는 알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협 방어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저들의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후방으로 우회한다면 후방의 몇몇 폴리스들이 크세르크세스에게 항복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적의 양동작전에 필패하고 말 것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해상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최선이라 주장하면서, 사로니코스 만에서 적의 함대를 좁고 거칠고 복잡한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여 그 곳에서 궤멸시키는 전략을 강하게 제안합니다. 이에 일부 장교들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그들은 지난 테르모필라이 전투와 아르테미시온 해전을 통해, 육지와 해상을 동시에 방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작전인지를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이 더 현실적이고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크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이 승리를 완전히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가 지난 두 전투처럼 수륙양공을 해온다면 헬라스 연합군으로써는 어떤 결과를 갖게되었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도, 크세르크세스가 테미스토클레스의 바람처럼 해전에 집중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는 그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그와 헬라스 연합군은 단 한번의 행운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헬라스 연합군은 그 단 한번의 마지막 행운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 사로니코스 만에 산재해있는 모든 함대를 살라미스 섬의 동북부 연안으로 집결시킵니다.



3.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


이즈음에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일단의 첩보를 입수합니다. 첩보에 따르면, 다수의 헬라스 함대가 살라미스 해협을 통해 에게 해 동쪽으로 달아날 계획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보내 헬라스 함대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결정하고 함대를 살라미스 해협 인근으로 진격시킵니다.

그날 밤, 페르시아 함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있던 시킨노스(Sikinnos)라는 페르시아 인을 시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게 합니다.

「이제 나도 더 버틸 용기가 나지 않소. 항복하는 바이오. 이에 몇 가지 정보를 보내는 바이오. 페르시아 군의 압도적인 규모에 용기를 잃은 우리 지휘관들은 지금 서로 내분을 벌이고 있소.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 출신의 해군들은 단독으로 철수를 결정했소. 곧 그들은 살라미스 해협의 동쪽으로 철수할 것인데, 페르시아 군이 살라미스 해협을 봉쇄한다면 그들의 철수를 막고 우리 함대를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오. 천운을 포기하지 말길 바라오.」

헬라스 연합군 입장에서는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의 충격적인 배신행위였는데도, 크세르크세스는 한 점 의심도 없이, 이를 그대로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즉시 함대로 하여금 살라미스 해협의 동쪽 입구를 봉쇄해버리는 한편, 이 통쾌한 해전을 관람하기 위해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아티카 반도 남단의 아이갈레오스 산(Mt. Aigaleos) 절벽 위에 황금 옥좌를 만들게 합니다.

[오늘날 살라미스 섬 해안]



독자들도 짐작하겠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서신은 그의 계략이었습니다. 그가 서신을 보내기 전까지만해도, 헬라스 연합함대의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서로 격렬한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 출신의 헬라스 인들은 서신의 내용처럼 해협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고, 투표 결과 역시 철수 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테미스토클레스의 서신의 내용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결국, 테미스토클레스는 고민끝에, 페르시아 군으로 하여금 살라미스 해협을 봉쇄하도록하여 헬라스 함대의 이탈을 막는 한편, 해협 깊숙이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하여 격파하자는 자신의 전술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후의 고육책인 거짓 항복을 내용으로 한 서신을 크세르크세스에게 보내게 한 것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속으로 되뇌입니다. "아! 페르시아 군이 내 뜻대로만 움직여준다면!"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어느 헬라스 인이 테미스토클레스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로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政敵)이었다가 도편추방을 당했던 아리스티데스(Aristides)였습니다. 그해 봄, 이미 아테나이에서는 본국의 방어를 위해 도편추방된 자를 복권시키는 법령을 통과시켜 시행을 하고 있었던 터라, 아리스티데스 역시 5년 만에 추방령에서 복권되어 아테나이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나이가 함락하자,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해와 있었던 것이죠.

아리스티데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란 테미스토클레스. 그런 그에게 아리스티데스는 페르시아 함대가 해협을 봉쇄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그야말로 고대하던 낭보였습니다. 아울러 지난 날에는 정적이었지만 이렇게 귀중한 정보를 가져다 준 아리스티데스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말합니다.

"그대만큼 정직한 인물도 드뭅니다. 오히려 그대같은 사람이 한때 나의 정적이었다는 것에 오히려 자부심마저 생기오. 허나 이 정보를 내가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오. 청컨대, 내일 군사회의에서 그대가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말해주시오. 모두 그대가 정직한 인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의 말은 무조건 믿을 것이오."

"과찬이시오. 대신 나도 청하리다. 나를 이번 전투에서 그대의 부장으로 써주시오. 그렇다면 그대 말대로 내일 사람들 앞에서 이 정보를 전하리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를 부장으로 삼겠다고 약속했고, 다음날 아리스티데스는 군사회의에서 좌중에게 자신이 접한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에 철수를 강하게 주장하던 펠로폰네소스 출신의 지휘관들은 모두 전투에 임하기로 결심합니다. 이제 개전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계속)









※ 참고서적

- '역사', 헤로도토스 著, 천병희 譯, 숲출판사
- '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著, 이순호 譯, 책과함께
- 'The Greco-Persian Wars', Peter green 著,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The Greek and Persian Wars, 499–386 BC.', Philip de Souza 著, Osprey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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