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식으로 조선을 알다
- 조선사 주막(酒幕) -
▶️ 간장게장
조선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나오는 맛있는 조선사(朝鮮史)주막입니다. 🎵🎶
⚜ 소론이 간장 게장을 입에도 대지 않았던 이유
신임사화 후 정권을 되찾을 그 날을 그리던 노론(老論) 세력에게 그 날이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1724년 8월, 경종(景宗)은 고질병이 도져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이미 경종 3년부터 용하다는 의원을 들여 약을 1백 수십 첩이나 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약을 계속 복용하는 바람에 경종은 내장이 허해져 음식을 싫어하는 날수가 오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8월 21일 밤, 경종(景宗)이 갑자기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프다고 호소해 어의들이 들어와 진단을 했는데, 그 전날에 세제 연잉군(延礽君)이 바친 간장게장과 생감을 먹은 것이 문제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의원들은 얼굴이 흑색이 되어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는 것은 한방에서는 매우 꺼리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후 경종(景宗)은 어떤 약을 처방해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더니 복통과 설사가 매우 심해졌고, 그러자 연잉군(延礽君)은 어의들에게 인삼과 부자가 병세를 완화시킬 수 있으니 급히 처방해서 올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경종(景宗)은 8월 25일에 창경궁 환경정에서 승하하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민간에서는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속설이 생겨 이를 금기시하게 되었고, 소론(少論)들은 자신들이 받들던 국왕이 게장을 먹고 죽었다고 생각하여 게장을 입에도 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종(景宗)이 승하하자 세제인 연잉군(延礽君)이 왕위를 계승하여 조선 제 21대 국왕인 영조로 등극했습니다.
(영조)
영조(英祖)가 왕위에 올라 통치를 하고 있는 중에도 경종이 영조가 올린 게장에 이해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일파만파 퍼져 나가고 있었지요.
그러자 영조(英祖)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인 1725년에 노론 대신들을 정계에 복귀시켰고, 그 덕분에 노론(老論)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론(少論)들은 분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남인에 속하는 이인좌, 한세홍 등과 손을 잡고 소현 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李坦)을 왕으로 추대하는 이른바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인좌(李麟佐)는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지탄을 받았던 윤휴(尹鑴)의 손녀 사위로 전라도 지역의 전주와 남원 장터에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괘서를 붙여 여론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러자 이에 동요한 지역 유지들이 자금을 각출하고 집안의 노비를 동원하기 시작해 1728년(영조 4년) 3월 15일에 드디어 이인좌(李麟佐)는 장례를 치르는 척 하면서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들어가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했습니다.
청주성 점령에 자신감을 가진 이인좌(李麟佐)는 북으로 진격하여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장악하면서 각 지역에 수령을 파견하고 어려운 백성에게는 관곡을 지급하기도 했어요.
또한 성난 민심을 이용해 백성들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도 보충했지요.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의 호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데, 안동의 유생들이나 호남의 세력가들이 군사 동원에는 비협조적이었지요.
게다가 조정에서는 오명항(吳命恒)을 도순무사로 임명하여 반란군 진압에 나섰는데, 마침내 안성에서 반군을 진압하며 맹렬한 추격전을 펼쳤습니다.
신길만을 비롯한 향촌 사람들과 승려들이 합세하여 산사에 숨어있던 이인좌(李麟佐)를 붙잡아 오명항에게 넘겼습니다.
오명항(吳命恒)은 거짓으로 이인좌의 목을 베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을 베어 장대 끝에 '적괴 이인좌'라고 써서 목을 매달아 군중들을 제압해 나갔습니다.
그후 이인좌(李麟佐)는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한양에서 속을 끓이며 반란군의 진압 소식을 기다리던 영조(英祖)는 마침내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친히 숭례문까지 나가 오명항을 맞이했습니다.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이인좌(李麟佐)에 대한 친국이 시행되었고, 이인좌는 함께 공모한 자들과 그동안의 일들을 자백한 후 다음 날 참수를 당했습니다.
반란군의 괴수는 원래대로라면 능지처사를 해야 하지만, 그가 윤휴의 손녀 사위임을 참작한 것입니다.
출처 - 역사이야기
결국 이렇게 이인좌(李麟佐)의 난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이후에도 소론들은 한동안 가장 게장을 입에 대지 않는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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